춥고 배 고프지 않으면 세상이 행복한 것이다.
에디터 : 박규동

2008년 8월 24일
 흐린 날이긴 하여도 비가 그쳤기에 얼른 찜질방을 떠났다.
 발질이 가벼웠다. 드디어 강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문진 인근에서 아침하는 식당을 만났다. 50대 후반의 부부가 운영하는 조촐한 식당이지만 인심은 큰 빌딩을 가진 사람보다 후 했다. 밥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는 비에 젖었던 빨래를 꺼내 헹구고 설거지를 했다. 해가 쨍하고 나서 우리는 빨래와 젖은 옷가지를 널어 말렸다. 피로도 함께 말리는 기분이었다.

 김치찌개에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만 몸에서 자꾸 당기는 것 같다. 식사조절을 하느라 평소에는 한 공기도 다 먹지 않았었는데 운동량이 늘면서 밥을 더 먹게 된 것이다. 몸에서 지방이 빠져 나가면서 체중도 줄었다. 종아리와 무릎 부분은 피골이 상접한 데, 안쓰러워 만지는 내 손가락도 뼈 마디 소리가 덜거덕 거리는 것 같다.

 양양을 지나면서 멀리 설악산이 눈에 들어 온다.
 설악산이다!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간다"는 말로리의 등산 명언에 비하면 나는 "설악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다녔다."
 20대 후반 늦깍이로 시작한 나의 산행은 모든 게 설악산에 맞춰져 있었다. 1,708m의 키로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솟은 설악은 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여름보다 겨울 설악이 더 좋았다. 눈이 깊이 쌓이면 눈을 다루는 등반기술을 익히기에 좋았고 계곡마다 얼음폭포가 있어서 빙벽훈련에도 좋았다.
 설악산은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메카이다. 설악산에서 배운 작은 솜씨로 나도 히말라야, 알프스, 알라스카, 씨에라네바다, 뉴질랜드...... 등으로 먼 산을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설악산을 가려고 백담사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데에도 하루가 걸렸다. 거의 모든 길이 비포장이라 체력이 없으면 버스 타기도 겁이 났다. 차멀미에 토하고 기진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한계령이나 미시령이 없던 시절이라 진부령을 넘어 속초로 가서 다시 시내 버스로 설악동에 다다랐다.
 설악산이 좋은 건 바다가 가까히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청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은 정말 나무랄 데 없이 기쁘다. 바다가 설악을 키운 것이다.

 살아 오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나는 홀로 설악에 들었다. 영혼의 안식과 정신의 충만을 채울 수 있었다. 12선녀탕계곡에 눈이 쌓이면 그 눈길이 나는 좋았다. 며칠 먹을 식량을 챙기고 비박을 하면서 얼음과 눈을 만끽할 수 있어서 나는 홀로 계곡에 머문 적이 여러번이었다.
 홀로 겨울 산에 머물면 욕심이 좁아 든다. 춥고 배 고프지 않았으면 하는 게 욕심의 고작이 된다. 춥고 배 고프지 않으면 세상이 행복한 것이다. 그 이상은 부질 없는 허망인 것을 알게 된다.
 
 예순 둘에 세상을 떠난 산악회 큰 형님이 계셨다. 암을 선고 받아 둔 상태로 함께 설악산을 3일 간 산행하면서 나에게 했던 간절한 소망이 떠 오른다.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 전 재산을 다 줄거야!"
 "6개월 더 사시면 뭘 하시고 싶으신데요?"
 "설악산 계곡이나 능선에 아직 내가 못 가 본 데가 있어! 그걸 다 둘러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어!"
 지금, 나는 큰 형님의 나이보다 더 살아서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다. 큰 형님이 다 둘러보지 못한 원을 헤아리면서 말이다.

 낙산사부터는 낯익은 길이다.
 대포 항을 지나 속초 중앙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비빔밥을 먹었다. 싱싱한 오징어를 국수처럼 썰어서 초장에 비벼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맛 있다.
 바게트도 사고 주스도 한 통 샀다. 기온이 많이 내려서 아침에는 바람막이를 입어야 할 정도이다. 물과 음료수도 먹는 량이 많이 줄었다.

 간성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간성 장에서 저녁거리 반찬을 샀다. 만만한 게 김치찌개다. 돼지고기는 필수요, 감자도 몇 알 샀다. 장터에 찬거리 나물을 내다 팔고 있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농을 건넨다.
 "시집을 잘못 갔나, 장가를 잘못 들었나? 이 복 더위에 사서 고생을 하고 있어!?"
 "내가 장가를 잘못 든 것 같아요."
 "아, 그럼 색시가 먼저 가자고 졸랐구만."

 간성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46번 국도로 접어 든다.
 7번이 끝이다. 호르라기를 불면서 교통정리를 하던 헌병이 몸짓도 크게 거수경례를 한다. 나도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헌병의 눈길이 한참을 따라 온다. 속초에서 금강산을 오가는 길목이다.

 삼거리에서 진부령 꼭대기까지 23km이다.
 아내는 집에서 떠나는 날부터 진부령을 걱정했다. 진부령을 나하고 두 번을 오른 경험이 있지만 트레일러를 끌고 오르는 게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내일은 드디어 진부령을 넘는 날이다.


 경사가 보일 듯 말 듯한 길을 5km 더 가서 광산초등학교에 여장을 풀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구석에 정자가 있었다. 방학 중이라서 그런지 기척이 없었다.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관사에 거주한다는 여자 선생님이 외출에서 돌아왔다.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일이 개교라서 늦게까지 있으면 곤란하다고 하길레 우리는 아침 여섯 시에 떠날 거라고 했다. 과일도 선물 받았다.

 텐트 칠 자리로 마을 정자를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건 고마운 일이다.
 수원 원천 유원지와 처제가 왔을 때인 송정에서를 제외 하고 모두 정자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우선 비를 맞지 안아서 좋고 텐트의 후라이를 치지 않아도 된다. 이슬도 막아 주고 아내와 마주보고 앉아 밥 먹기에도 좋았다. 가끔은 동네 노인들과 담소도 나눌 수 있으니 그만이다.
 자전거여행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학교 교훈이 멋있다. "끝가지 명예롭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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